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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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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188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1941년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도조는 군사적 능력과 독재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었으며, 현재까지도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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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조 히데노리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육군대학교 수석 졸업 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러일 전쟁에 참전, 중장으로 진급했으나 작전 미스로 예비역 편입 후 전술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도조 히데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조 히데키
1945년경 도조
본명東條 英機
로마자 표기Tōjō Hideki
출생일1884년 12월 30일
출생지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현재 도쿄도 지요다구)
사망일1948년 12월 23일
사망 원인교수형
사망 장소점령하 일본 도쿄도 스가모 형무소
국적일본 제국
정당대정익찬회 (1940년–1945년), 무소속 (1940년 이전)
종교불교
배우자이토 가쓰코 (1909년 결혼)
자녀아들 3명, 딸 4명
학력일본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서명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5년–1945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주요 지휘관동군 (1932년–1934년)
주요 전투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국공 내전
만주사변
2.26 사건
제2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차하르 작전
정치 경력
칭호종2위
훈장욱일대수장
공2급 금치훈장
서보장
직책제40대 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군주쇼와 천황
이전 총리고노에 후미마로
다음 총리고이소 구니아키
육군대신고노에 후미마로 (1940년–1941년)
본인 (1941년–1944년)
육군대신 재임 기간1940년 7월 22일 – 1944년 7월 22일
이전 육군대신하타 순로쿠
다음 육군대신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본인
참모총장 재임 기간1944년 2월 21일 – 1944년 7월 18일
이전 참모총장스기야마 하지메
다음 참모총장우메즈 요시지로
초대 군수대신본인 (총리 겸임)
군수대신 재임 기간1943년 11월 1일 – 1944년 7월 22일
제24대 상공대신본인 (총리 겸임)
상공대신 재임 기간1943년 10월 8일 – 1943년 11월 1일
제53대 문부대신본인 (총리 겸임)
문부대신 재임 기간1943년 4월 20일 – 1943년 4월 23일
제59대 외무대신본인 (총리 겸임)
외무대신 재임 기간1942년 9월 1일 – 1942년 9월 17일
제57대 내무대신본인 (총리 겸임)
내무대신 재임 기간1941년 10월 18일 – 1942년 2월 17일
육군 차관 재임 기간1938년 5월 30일 – 1938년 12월 10일
가족 관계
조부도조 히데토시
부친도조 히데노리
모친도조 치토세
형제자매도조 히사시
장인이토 만타로
사위스기야마 시게루
고가 히데마사
다카모리 다쓰이치
손녀도조 유부코
범죄 행위
범죄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재판극동 국제 군사 재판
형벌사형
집행 상태사형 집행
피해자수백만 명
대상중국인, 한국인, 인도차이나인, 인도네시아인, 말레이시아인, 필리핀인, 호주인 및 기타 민간인, 연합군 전쟁 포로
국가아시아 여러 국가
시작 년도1937년
종료 년도1945년

2. 생애와 경력

총리 시절의 도조


도조 히데키는 1884년 도쿄부 고지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61] 본적지는 이와테현이다. 두 형이 일찍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자랐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 27기를 졸업했다. 이후 스위스독일에서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고 육군대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1920년대부터 군내 통제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황도파와 대립했다.[262] 나가타 데쓰잔 사후 통제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육군 내 영향력을 키웠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다. 1935년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 관동군 참모장을 역임하며 신속한 일 처리 능력으로 "면도날"(剃刀|가미소리일본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중일 전쟁 확대를 주도했으며,[5]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 대신으로 발탁되어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이 시기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삼국 동맹 조약 체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강행하며 미국, 영국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1941년 미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철수 요구에 강경하게 반대하며 고노에 내각 붕괴에 영향을 미쳤고,[263] 같은 해 10월 18일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총리 취임과 동시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으며, 관례를 깨고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을 겸임하며 권력을 집중시켰다.[264] 또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사실상 자살 공격을 강요하며 옥쇄(玉碎)를 부추겼다.[267][265]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 일본군의 승리로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 등을 겸임했다. 1943년에는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1944년에는 국무와 통수권 일원화를 명분으로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전쟁 후반 전황이 악화되면서 1944년 7월 사이판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항복 후인 1945년 9월, 연합군에 체포되기 직전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개전 및 전쟁범죄 혐의(A급 전범)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2. 1. 초기 생애

청년기의 도조


도조 히데키는 1884년 12월 30일[37][38][45][39][40][41][42] 도쿄부 고지마치구(현 도쿄도 지요다구 고지마치)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이었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261]와 어머니 도쿠나가 지토세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61] 본적지는 이와테현 모리오카시[37]이다. 그의 두 형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대우받았다. 도조 가문은 에도 시대모리오카번에 봉사한 사무라이 계급의 노(能) 가문이었으나,[43][44]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1][2] 아버지 히데노리는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음에도 장주(長州) 파벌과의 관계 때문에 출세가 늦었다고 여겼다.

어린 시절 도조는 고집이 세고 유머 감각이 부족하지만, 원하는 것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성격으로 알려졌다. 다른 아이들과 싸우기를 좋아했으며, 평범한 지능을 가졌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은 성실한 노력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능력 덕분이다"라고 말하곤 했다.[20] 가쿠슈인이나 육군 유년학교 시절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211] 189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17기로 졸업할 때는 상위권 성적을 기록했다.[211] 졸업 후 육군 보병 소위임관하여 근위 보병 제3연대에 배속되었다. 1907년에는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했다.

1905년 러일 전쟁을 종결시킨 포츠머스 조약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불만을 품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시베리아를 합병하지 못한 것을 미국의 중재 탓으로 돌리며 반미 감정을 가졌는데,[24] 이는 도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24]

1909년 이토 가쓰코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다.[3] 차남 도조 데루오는 훗날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의 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고, 삼남 도조 도시오는 공군 소장이 되었다.

아버지의 권유와 본인의 승부욕으로 육군 장교의 엘리트 코스인 일본 육군대학교 입학 시험에 도전하여, 세 번의 시도 끝에 1912년 합격했다.[211] 1915년 육군대학교 27기를 11등으로 졸업하고 육군 보병 대위로 진급하여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211] 육군대학교 졸업 성적은 우수하여 해외 근무 자격을 얻었다.

1919년 스위스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고, 1920년 귀국 후 소좌로 승진했다. 1921년에는 다시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가 1922년 귀국하여 육군대학교 교관을 맡았다. 1924년에는 육군 보병 중좌로 승진했다.

1920년대에 도조는 군 내 파벌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나가타 데쓰잔 등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 운영을 지향하는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262] 통제파는 천황 중심의 급진적 국가 개조를 주장한 황도파(아라키 사다오 등이 주도)와 대립했다. 나가타 데쓰잔이 암살된 이후, 도조는 통제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일본 제국 육군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2. 2. 군 경력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363명 중 10위)[4]하고 육군 보병 소위임관되어 근위보병 제3연대에 배속되었다.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고,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 27기를 졸업한 후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 일본군 원정대의 일원으로 시베리아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1919년 스위스, 1921년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 바덴바덴의 밀약에 참여하며 나가타 데쓰잔, 오바타 도시로, 오카무라 야스지 등과 교류했다.[47][48] 1922년 귀국하여 육군대학교 교관을 맡았으며, 이후 소좌(1920년), 중좌(1924년), 대좌(1928년)로 승진했다.

1920년대부터 군내 파벌 정치에 관여하여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나가타 데쓰잔 등과 함께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262] 통제파는 아라키 사다오가 이끄는 황도파와 대립했으며, 나가타 데쓰잔 사후 도조는 통제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일본 육군 내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1928년 육군성 정비국 동원과장, 1929년 보병 제1연대장을 역임했다. 연대장 시절에는 부하들의 신상과 가정환경을 파악하고 내무반을 직접 방문하는 등 병사들에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 "인정 연대장"으로 불리기도 했으나,[51][52]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부하들에게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서구 문화의 영향에 비판적이었으며 군국주의적 국가관을 견지했다.

1931년 참모본부 총무부 제1과장(편성동원과장)에 취임하여[45][53]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기 육군의 만주 정책 수립에 관여했다. 1933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성 군사조사부장 등을 지냈고, 1934년 보병 제24여단장에 임명되었다.

중장 시절의 도조 히데키


1935년 만주국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1936년 2.26 사건 당시 반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관동군 내 황도파 장교들을 체포하는 데 관여했다. 이 사건 이후 통제파는 군부 내 주도권을 확립했다. 도조는 같은 해 12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7년 3월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5] 이 시기 그는 신속하고 날카로운 업무 처리 능력으로 剃刀|가미소리일본어("면도날")라는 별명을 얻었다. 참모장으로서 내몽골 지역으로의 군사 작전을 지휘했으며,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전쟁 확대를 주장하며 직접 차하르 사변에 참전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소환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1940년까지 육군항공총감을 겸임했다.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 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육군 대신으로서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삼국 동맹 조약 체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 허용을 추진하며 영국, 미국과의 전쟁 준비에 깊이 관여했다.

'''군 경력 요약'''
연도계급/직위비고
1905년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17기), 육군 보병 소위 임관근위보병 제3연대 배속
1907년육군 보병 중위 진급
1915년일본 육군대학교 졸업(27기), 육군 보병 대위 진급근위보병 제3연대 중대장
1919년스위스 주재 무관
1920년육군 보병 소좌 승진
1921년독일 주재 무관
1922년육군대학교 병학교관
1924년육군 보병 중좌 승진
1928년육군성 정비국 동원과장, 육군 보병 대좌 승진
1929년보병 제1연대장
1931년참모본부 총무부 제1과장편성동원과장[45]
1933년육군 소장 승진, 육군성 군사조사부장
1934년보병 제24여단장
1935년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6년육군 중장 승진
1937년관동군 참모장
1938년육군차관, 육군항공총감 겸임
1940년육군대신제2차, 제3차 고노에 내각
1941년내각총리대신,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 겸임, 육군 대장 승진도조 내각 출범



'''주요 훈장'''
연도훈장비고
1906년훈육등 서보장,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233]
1913년훈오등 서보장[233][245]
1920년훈사등 서보장, 욱일소수장, 다이쇼 3~9년 전역 종군기장[233][246]
1928년훈삼등 서보장[233][247]
1934년훈이등 욱일중광장, 쇼와 6~9년 사변 종군기장[233]
1937년-- 훈일등 서보장[233]
1940년-- 공이급 금치훈장, -- 훈일등 욱일대수장, 지나사변 종군기장[233]
외국 훈장
1937년만주국: 훈일위 주국장[248]
1939년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관 훈장[249]
1940년나치 독일: --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250], 만주국: 훈일위 경운장[251]
1941년이탈리아 왕국: 성 마우리치오·라자로 훈장 그랑코르도니[252], 태국: 백상훈장 훈일등 대십자 기사장[252]
1942년태국: -- 백상훈장 훈특등 대수 기사장[253], 만주국: 훈일위 용광대수장[255]
1943년만주국: 대훈위 난화대수장[256], 왕징웨이 정권: 특급 동광훈장[257], 태국: -- 츄라촘클라오 훈장 그랜드 크로스[258]


2. 3. 정치 경력

1920년대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나가타 데쓰잔 등과 함께 군 중심 국가를 표방한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262] 통제파는 일본 천황 중심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 파벌 황도파를 이끌던 아라키 사다오와 대립했다.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도조는 통제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일본 육군을 이끌게 되었다.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으며, 1934년에는 육군성 인사국장을 역임하며 『비상시 국민전집』(非常時國民全集)에 글을 기고하여 일본이 전체주의적인 "국방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신속하고 날카로운 일 처리 능력으로 "면도날"(剃刀|가미소리일본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관동군 시절 남만주철도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와 만주국 산업차관 기시 노부스케와 가까워졌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발생 시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을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 확대를 주도했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938년 12월부터 1940년까지 육군항공감찰관을 지냈다.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으로 임명되어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했다.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일본의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참가를 주도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주둔을 강행하여 영국미국과의 전쟁 준비를 본격화했다.

1941년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요구하자 강경하게 반대하며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263]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권력 강화를 위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을 겸임했으며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264] 또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제정하여 병사들에게 사실상 자살 공격을 강요하며 옥쇄(玉碎)를 부추겼다.[267][265] 이로써 내각을 장악하고 군사 국가 체제를 강화하여 일본 제국 전역을 전쟁 수행 체제로 몰아갔다.[266]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 동남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고, 1942년에는 외무대신, 1943년에는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까지 겸임했다. 1943년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의 아시아 질서 구축을 시도했다.

1944년 국무와 통수권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육해군 통수부 총장을 경질시키고 스스로 참모총장 직을 겸임했다. 그러나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944년 7월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긴 사이판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도조 히데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지만, 그의 실제 권력과 지도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군사사가 A. J. P. 테일러는 그를 다른 주요 연합국 및 추축국 지도자들과 동급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총리,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 여러 직책을 겸임했지만, 육해군 간의 대립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지 못했고, 특히 해군의 작전 결정에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육군 내에서도 통수부의 결정에 제동을 걸기 어려워 "통수권 독립하에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사토 켄료는 도조가 독재자적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회의에서 전쟁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도 구체적인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패배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3. 처형

도조 히데키 자살 실패 후 미군에게 응급처치를 받는 모습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피고석에 선 도조


1945년 8월 15일 일본연합국무조건 항복하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GHQ의 점령 통치가 시작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는 도조를 포함한 전범 용의자 40명의 체포를 명령했다.[6] 도조는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하며 자택에 머물렀다. 그는 전쟁 책임자로서 처벌을 받아들이면서도, 전쟁의 책임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있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119]

1945년 9월 11일, 미군 헌병(MP)들이 도조의 자택을 포위하자 그는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으나, 총알이 심장을 빗나가 실패했다.[267] 현장에 있던 미군 MP들이 즉시 응급 처치를 시행했고,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요코하마시의 미군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과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당시 도조는 피를 흘리며 "대동아 전쟁은 정당하고 의로운 것이었다. 아시아 민족들에게 죄송하다. 역사의 공정한 심판을 기다린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도조의 자살 시도 실패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할복이 아닌 권총을 사용한 점, 급소를 맞추지 못한 점 등이 아난 고레치카 등 다른 육군 고관들의 자결과 비교되며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20] 왼손잡이임에도 오른손으로 총을 쏘았기 때문이라는 설, 익숙하지 않은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다.[121][122] 일부에서는 미군 MP의 총격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105], 이는 명확히 부정되고 있다.[122][123]

회복 후 도조는 스가모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기소된 주요 혐의는 침략 전쟁 공모 및 수행, 전쟁법 위반, 포로 학대 명령·허가·묵인 등이었다.[1][8][9][10] 재판 과정에서 일본 제국이 자행한 대학살, 인체 실험, 기아, 강제 노동 등으로 인해 수백만 명(최소 300만[11]에서 최대 1400만[12])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가 사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도조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13][14][15][16][17]

재판에서 도조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전쟁은 자위 전쟁이었으며 히로히토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 전쟁의 책임은 나 혼자에게 있으며, 천황 폐하를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는 일체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며[127][128], 재판 자체를 "승자의 보복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변호는 주로 국가 변호에 집중되었으며, 미국의 경제 압박과 군사력 증강이 일본의 자위 결의를 촉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결문은 도조가 "매우 뻔뻔하게(with hardihood)"[130] 자신을 변호했으며 자위 전쟁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131] 한편,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이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의 기소를 막기 위해 도조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도조는 재판 중 천황의 최고 권위를 언급했다가 검찰 측의 압력으로 증언을 수정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 12일, 도조는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사형(교수형)을 선고받았다.[18] 그는 판결에 대해 "결국 정치재판으로 끝났다. 승자의 재판이라는 성격은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회를 유서에 남겼다.[138]

처형 전 도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참회보다는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을 노래하는 유언시를 남겼다.[268]

> "이제 떠나네 유위의 깊은 산 오늘 넘어 아미타부처님의 곁으로 가는구나 기쁘게"


> "내일부터는 누구에게 막힐 곳 없이 아미타부처님의 곁에서 편히 잠들리"


> "해와 달도 반딧불의 빛 그와 같이 앞길에 아미타부처님의 빛이 찬란하네"

1948년 12월 23일 0시 1분, 도조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64세였다. 처형 직전에는 다음과 같은 사세구(辞世)를 남겼다.

> "나는 가더라도 다시 이 땅에 돌아오리라. 나라에 보답할 일을 다하지 못했기에."


> "이제 떠나가네. 이끼 밑에서 기다리리라. 야마토 시마네에 꽃이 피는 때를."


> "흩어지는 꽃도, 떨어지는 나무 열매도, 마음 없는 것은, 부추기는 것은 오직 폭풍뿐인가."


> "이제는 마음에 걸리는 구름도 없네. 마음 풍족하게 서쪽으로 서둘러 가네."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해 사과하고, 미군에게 공습과 원자폭탄 투하로 고통받은 일본 국민에게 연민을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도조의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고 요코하마시의 한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유골은 분쇄되어 다른 6명의 A급 전범 유골과 함께 미 육군 항공기에 실려 요코하마 동쪽 약 약 48.28km 지점의 태평양 상공에 뿌려졌다.[20][21] 그러나 화장터 직원 등의 도움으로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인근 사찰 주지 등이 몰래 잠입하여 유골 일부를 수습했고, 이 유골은 아타미 시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비밀리에 안치되었다가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사후

(내용 없음)

4. 1. 유골 및 묘소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유해는 미국 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았다. 유해는 요코하마시 니시구 쿠보초(西区久保町)의 쿠보야마 화장장(久保山火葬場)에서 화장된 후 분쇄되었으며, 태평양 해상 약 50km 지점에 항공기로 뿌려졌다.[139][140] 이는 이들이 영웅이나 순교자로 추앙받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141][142][140]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를 맡았던 미후지 마사히라(三文字正平) 등이 유골 회수를 계획했다는 주장이 있다. 미후지는 쿠보야마 화장장에서 화장이 이루어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인근 쿄젠지(興禅寺) 주지 등과 공모하여 1948년 12월 26일 심야에 화장장에 잠입, 화장장 직원의 도움으로 남겨진 재 속에서 7명 분량의 유골 일부를 회수했다고 한다. 회수된 유골은 골함 하나 분량이었으며, 아타미시 이즈산(伊豆山)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으로 옮겨져 비밀리에 안치되었다.[143] 미국 공식 기록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유골 일부가 실제로 남았거나, 미군 병사들의 부주의, 혹은 화장장 측이 다른 유골을 대신 주었을 가능성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1958년(쇼와 33년)에는 이들 전범을 위한 묘소 신축 계획이 제기되었고, 1960년(쇼와 35년) 8월 아이치현 니시오시(당시 하즈군 하즈정)의 미카네 산(三ヶ根山) 정상에 순국칠사묘(殉国七士廟)가 건립되었다. 고아 관음에 있던 유골은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144]

잡사가야 령원에 있는 도조 히데키의 묘


이 외에도 도쿄 잡사가야 령원(雑司ヶ谷霊園)에 도조 히데키의 묘가 있다.

4. 2.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된 도조 히데키는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이 합사는 1966년후생성(현 후생노동성)이 도조를 포함한 A급 전범 14명의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낸 것에서 시작되었다.[146]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이들의 합사를 결정하였고, 결국 1978년 실행에 옮겨졌다.[146]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합사 결정이 도조 히데키 자신이 과거 육군대신 시절 내렸던 지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도조는 당시 야스쿠니 신사 합사 대상을 “전사자 또는 전상사 등 전쟁 근무에 직접 기인하여 사망한 자에 한한다”는 통달을 내린 바 있다.[145]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는 이후 일본 국내외에서 지속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5. 평가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행적과 리더십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며, 특히 전쟁 책임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과 비판이 따른다.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본 한국, 중국 등 주변국에서는 도조 히데키를 용서하기 어려운 '전쟁 범죄자'로 간주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270] 그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이자[269] 철저한 전쟁 수행자로 평가받으며,[270] 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에게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270]

또한, 군인들에게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 정신을 강요하며 죽음을 미화했지만,[267][272] 정작 자신은 패전 후 자살 시도에 실패하고[6] 재판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비겁한 사무라이'라는 강한 비판도 제기된다.[271][274][275]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핵심 당사자로서[266] 이러한 비판은 더욱 부각된다.

도조 히데키에 대한 구체적인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는 아래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5. 1. 긍정적 평가

도조 히데키는 날카롭고 법률적인 사고방식과 신속한 의사결정 능력으로 인해 '카미소리'(カミソリ, 면도날)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타 이쿠히코는 도조가 유능한 관리였으며, 이것이 쇼와 천황의 마음에 든 부분이라고 평가했다.[51] 시게미쓰 마모루 역시 도조의 예리한 두뇌, 요점 파악 능력, 결단력이 다른 군벌들보다 뛰어났다고 평가하면서도, 관용과 세계 정세에 대한 지식 부족이 파국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203] 여행 중 민가의 쓰레기통을 직접 확인하며 배급 상황을 점검하려 했다는 일화는 그의 꼼꼼한 일면을 보여주며, 이는 배급 담당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천황의 국민 생활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고 스스로 설명했다.[150][151]

쇼와 천황은 도조를 매우 신뢰했는데, 하라 고는 그 이유를 도조가 이전의 각료나 참모총장들과 달리 진실을 제대로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51][201] 쇼와 천황은 도조에 대해 "열심히 일을 하고, 평소에 말하는 것도 신중하며 꽤 좋은 점이 있었다"고 평가했으며[51], 총리 취임 시 천황의 전쟁 회피 의사를 최우선으로 삼으려 노력했다고 보았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일 궁궐을 향해 통곡했다는 일화는 이러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군신의 생각이 일치한 것에 감격하여 울었다는 주장도 있다.[51] 천황은 도조가 돌릿틀 공습 미군 포로 전원 사형 주장에 반대하고, 사이판 섬 함락 시 민간인 자결 강요에 반대한 점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51] 실각 후 천황으로부터 전례 없는 감사의 칙어를 받았다는 사실은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다.[51] 쇼와 천황은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조언 후 도조가 사표를 제출한 것에 대해 "곤룡포 자락에 숨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며 당당하게 제출한 것이다. 나는 도조에게 동정하지만, 굳이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진상을 밝혀두고 싶어서 이것만 말해둔다"고 말하기도 했다.[51] 기도 고이치 또한 "폐하의 명령이라고 하면 정말 온힘을 다해 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그의 충성심을 언급했다.[202]

구체적인 행동 중에서는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고 나치 독일의 항의를 "당연한 인도주의적 배려"라며 거부한 일이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헨리 스콧 스토크스는 이를 높이 평가했다.[209] 또한 언론인 고정이득은 도조가 세간의 평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며, 언론계를 적대시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에 대한 헌병대의 조사를 막아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152]

도쿠토미 소호는 도조를 비롯한 전시 지도자들이 악인이나 바보는 아니었으나, 러일 전쟁 시대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 큰 짐을 졌다고 평가하며, 그들의 능력보다는 시대적 상황과 과업의 무게를 강조했다.[204] 쿠리스 기사부로는 도조가 대동아주의 실현에 진지했으며, "일본은 동아의 맹주"라는 문구를 직접 삭제하는 등 이상 실현에 열정적이었으나 현장의 몰이해로 비판받았다고 술회했다.[206] 도쿄 재판의 판사였던 네덜란드의 베르트 레이링크는 도조를 포함한 피고들이 훌륭한 인격자였으며, 특히 도조의 증언은 "냉정침착하고 지능이 명석한 그다운 훌륭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다만 레이링크는 재판 자체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제기하며 판결이 정확한 증언과 국제법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야마다 후타로는 당시 일본인들이 도조를 히틀러 같은 괴물 독재자가 아닌 단순한 육군 대장으로 여겼다고 회고하며[207], 전후 도조에 대한 비판이 과도하고 GHQ의 의혹 제기 등은 도조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207] 한편, 세이부 스스무와 같은 평론가는 도조를 포함한 A급 전범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역사의 연속성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대미 전쟁을 "패배를 각오한 위대한 조국 방위전"으로, 도쿄 재판을 "정치 쇼"로 규정하는 등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208]

5. 2. 부정적 평가

우지 도시히코는 도조가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적이었으며,[269]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하며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중국, 한국 등 주변국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보았다.[270]

장성훈은 저서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에서 도조 히데키를 '비겁한 사무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271]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던 도조는 군내 요직을 거치며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군인 신분으로 총리가 된 후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직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핵심 인물이었다.[266] 그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명예롭게 죽으라는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죽으라는 의미)를 강요한 장본인이었다.[267][272] 이 훈령으로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273] 정작 도조 자신은 일본 항복 후 고의성이 짙은 자살 미수 소동을 벌였고, 전범 재판에서는 책임을 회피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274] 장성훈은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했던 지도자로서 도조의 이러한 모습은 부끄러운 일이며,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75]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는 침략 전쟁 수행, 국제법 위반, 포로 학대 등 여러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1][9][10] 그의 군 통치 기간을 포함하여 일본 제국이 저지른 마닐라 대학살, 731 부대의 인체 실험, 기아, 그리고 강제 노동 등으로 인해 수백만 명(일부 추산 300만[11]~1,400만 명[12])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가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이 지적된다.[13][14][15][16][17]

항복 후 체포 직전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심장을 빗나가 실패한 사건은[6] 그가 군인들에게 강요했던 '전진훈'의 내용("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과 대비되며 비판받았다.[124][106] 당시 여러 신문은 할복한 다른 육군 고위 장성들과 비교하며 권총을 사용한 점, 실패한 점 등을 들어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다.[120] 자살 시도 자체를 연극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121][122]

재판 과정에서 도조는 전쟁의 전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전쟁은 미국의 경제 압박에 의한 자위 전쟁이었으며, 히로히토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고, 대동아공영권 정책은 침략이 아닌 아시아 해방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하는 등[127][128] 일관되게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판결문에서는 이러한 그의 변호를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131] 진주만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았는지에 대한 증언 번복[85] 등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군사사가 A. J. P. 테일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다른 주요국 지도자들과 달리 일본의 전쟁 지도자는 불분명하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도조가 총리, 육상, 참모총장을 겸직했음에도 실제 권력은 제한적이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육해군 간의 대립 조정에 소극적이었고, 통수권 독립의 한계 속에서 전쟁 지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사토 겐료는 도조가 독재자의 자질은 없었으며, 소심하고 신중했지만 고집이 세고 시야가 좁았다고 평가했다.[197] 이토 타카시는 도조가 전쟁 승리를 강조했지만 구체적인 비전 제시는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패색이 짙어진 후에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으며,[113][147] 종전 직전에는 "이렇게 약한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쟁 지도에 임했던 불명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국민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도조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마에다 토시타메 육군 중장의 전사를 공무 중 사망으로 처리하려 하거나,[181][180][183][184] 오자키 유키오를 불경죄로 체포한 사건[152] 등은 정치적 보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쓰마에 시게요시에게 행해진 것과 같은 이른바 '징벌 소집'이나 헌병을 동원한 통제 방식으로 인해 '도조 막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96] 관동군 시절 부하였던 이시하라 간지는 도조를 "도조 상등병"이라 부르며 무능하다고 공공연히 비판했고, "헌병 외에는 쓸 줄 모르는 졸장부", "의견도 사상도 없는 자"라고 혹평했다.

시바 료타로는 수필에서 도조를 "집단적 정치 발광 조합의 사무국장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198] 아가와 히로유키는 도쿄 대학 졸업식 연설 일화를 통해 도조의 오만함을 지적했다.[199] 후쿠다 카즈야는 도조가 일본적 조직 내에서는 인망을 얻는 유형이었으나, 현장주의에 매몰되어 외교적 해결 가능성을 간과한 치명적 실수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도 카즈토시는 저서에서 "쇼와 육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모순이 그에게 집약되어 있는 듯한,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조가 두뇌는 명석했으나 관용과 세계 정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고 평가했고,[203] 도쿠토미 소호는 도조가 악인이나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으나 시대적 과업에 비해 역량이 부족했다고 보았다.[204]

5. 3. 한국의 관점

우지 도시히코는 도조 히데키를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269]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하며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해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범’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단언했다.[270]

장성훈은 그의 저서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에서 도조 히데키를 '비겁한 사무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271] 도조는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핵심 엘리트였으며,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총리,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직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핵심 인물이다.[266] 그는 부하들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명예롭게 죽으라는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의 정신을 강요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267][272][273]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일본 패망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소동을 벌였고, 전범 재판에서는 책임을 회피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274] 장성훈은 이러한 도조의 모습이 사무라이 정신과는 거리가 멀며, 일본 사회가 사무라이 정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75]

도조 히데키는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적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언행은 그의 침략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며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인들에게는 그의 다른 전쟁 범죄와 더불어 용서할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주변국 국민들의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6. 가계

도조 히데키는 1884년 12월 30일 도쿄 고지마치 지역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이었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 東條英紀일본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사무라이 계급 출신이었으나, 여러 세대에 걸쳐 봉사했던 거대한 다이묘(봉건 영주)의 비교적 하급 무사 가신이었다. 아버지는 사무라이 출신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불교 승려의 딸이었기에 가족은 존경받았지만 가난했다.[1][2]

1909년, 도조는 이토 카츠코 伊藤勝子일본어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4녀, 총 7명의 자녀를 두었다.[3] 손자는 총 14명이라고 전해진다.[227]


  • 장남 도조 히데타카 東條英隆일본어: 만주국 수도 경찰청에 근무했으며, 아버지가 관동군 헌병사령관이었을 때 만주에 머물렀다. 당시 아편왕 리미 푸의 집에 하숙하며 1936년 신경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압록강 발전 직원이 되었다. 약시로 병역 면제를 받았으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해군으로부터 소집되어 요코스카에서 종전을 맞이했다.[229] 전후에는 일본선박진흥회에 근무했으며, 1966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랫동안 도쿄를 떠나 이즈이토에 거주했으며, 아버지가 수감된 스가모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고 한다.[230]
  • 손녀 도조 유코 東條由布子일본어 (본명: 이와나미 스키에 岩浪淑枝일본어): 히데타카의 딸로,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 분사(分祀)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227]
  • 손자 도조 히데카츠 東條英勝일본어: 히데타카의 아들.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육군 수송부와 관계가 있던 세이부 운수의 배려로 입사하여 근무했다.
  • 증손자 토죠 히데토시 東條英利일본어: 히데카츠의 아들. 국제교양진흥협회 대표 이사이다.[228]
  • 차남 도조 데루오 東條輝雄일본어: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항공학과를 졸업하고 미쓰비시 중공업에 입사한 기술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전 설계에 참여했으며, 전후에는 최초의 국산 여객기인 YS-11과 항공자위대의 C-1 수송기 설계에도 참여했다. 이후 미쓰비시 중공업 부사장을 거쳐 미쓰비시 자동차 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1981년~1984년). 2012년 98세로 사망했다.
  • 삼남 도조 도시오 東條敏夫일본어: 아들 중 유일하게 군인의 길을 걸었다. 육군 예과 사관학교 (59기)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공장보(소장 계급)까지 진급했다. 2014년 88세로 사망했다.
  • 장녀 도조 고즈에 東條光枝일본어: 육군 군인 스기야마 시게루 杉山茂일본어와 결혼했다.
  • 차녀 도조 마키에 東條満喜枝일본어: 육군 군인 고가 히데마사 古賀秀正일본어와 결혼했으나, 후에 사회학자 다무라 켄지 田村賢治일본어와 재혼했다.
  • 삼녀 도조 유키에 東條幸枝일본어: 영화 감독 타카모리 타츠이치 鷹森立一일본어와 결혼했다.
  • 사녀 도조 기미에 東條君枝일본어: 미국인 사업가 데니스 르로이 길버트슨과 결혼하여 키미에 길버트슨 キミエ・ギルバートソン일본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7. 도조 히데키를 그린 작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육군항공대의 나카지마 Ki-44 전투기는 연합군에 의해 "토죠(Tojo)"라는 보고 명칭으로 불렸다.[24] 이는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대중문화에서도 도조 히데키의 이름이나 이미지가 사용되곤 했다. 프로레슬러 하롤드 와타나베는 악역 기믹인 토죠 야마모토를 만들 때 도조 히데키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참고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밴드 후두 구루스(Hoodoo Gurus)는 1983년에 "토죠"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29] 미국 폭스 방송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킹 오브 더 힐''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인 캐릭터 코튼 힐이 일본군을 "토죠"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도조 히데키가 등장인물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1945년 영화 ''태양의 피''에서는 로버트 암스트롱이[25], 1970년 영화 ''토라! 토라! 토라!''에서는 우치다 아사오가[26], 1998년 영화 ''프라이드''에서는 쓰가와 마사히코가 도조를 연기했다.[30] (자세한 목록은 하위 문단 참고)

도조 히데키는 대머리에 콧수염, 로이드 안경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외모와 특징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이 때문에 그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외모가 크게 닮지 않더라도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는 분장과 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7. 1. 소설


  • ''왼손잡이 독재자 - 도조 히데키의 비극''(左利きの独裁者―東條英機の悲劇일본어)
  • ''도조 히데키 - 대일본제국에 순직한 남자'' (東条英機―大日本帝国に殉じた男일본어)

7. 2. 영화

도조 히데키를 다룬 영화 목록
연도영화 제목도조 히데키 역 배우비고
1943년총통의 얼굴불명디즈니 애니메이션, 일본 미개봉
1945년태양의 피로버트 암스트롱[25]
1946년일본의 비극(본인 출연)
1959년대동아전쟁과 국제재판아라시 칸스로
1960년황실과 전쟁과 우리 민족아라시 칸스로
1970년격동의 쇼와 시대 군벌고바야시 케이주[27]폭군으로 묘사됨. 영화에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상직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려짐.
1970년도라! 도라! 도라!우치다 아사오[26]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묘사됨.
1973년전쟁과 인간 제3부 완결편이노우에 마사히코
1981년대일본제국탄바 데쓰로[28]미국과의 전쟁을 단독으로 계획한 가장으로 묘사되며, 영화는 그의 전범 재판을 다룸.
1989년제도대전쿠사나기 코우지로
1998년프라이드·운명의 순간쓰가와 마사히코[30]
2003년스파이 졸게타케나카 나오토
2004년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잊혀진 영웅켈리 도르지[31]
2008년난징의 진실 제1부 칠인의 사형수후지마키 준
2011년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야마모토 마사루
2012년종전의 엠페러히노 쇼헤이[32]
2015년일본의 가장 긴 날나카지마 슈
2019년미드웨이이다 히로모토
2020년아프리칸 쿵후 나치아키모토 요시토



이 외에도, 폭스 방송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킹 오브 더 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인 코튼 힐은 종종 일본군을 "토죠"라고 부르기도 했다.

7. 3. 다큐멘터리 드라마


  • ''서진 이야기'' (1968년, 간사이TV) - 와카미야 츄우사부로
  • ''낙일연유'' (1976년, NET) - 와카미야 다이스케
  • ''일본의 전후 제8집 심판의 날 극동국제군사재판'' (1977년, NHK) - 오자와 에이타로
  • ''위대한 아침'' (1979년, TBS) - 미나미하라 코우지
  • ''사라바 공중전함 후가쿠'' (1980년, ANB) - 우치다 아사오
  • ''산하연유'' (1984년, NHK) - 아쓰쿠니 쿠니야스
  • ''쇼와 16년의 패전'' (1991년, 후지TV) - 타카마쓰 히데로
  • ''목숨이었으니 비극의 외상 도고 시게노부'' (1994년, TBS) - 스마 케이
  •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개전과 도조 히데키'' (2008년, TBS) - 비트 타케시
  • ''기골의 판결'' (2009년, NHK) - 이와사키 히로시
  • ''낙일연유'' (2009년, TV 아사히) - 코미네 류지
  • ''경세제민의 남자 제3부 귀라 불린 남자~마츠나가 안자에몬'' (2015년, NHK) - 오오타케 마코토
  • ''두 개의 조국'' (2019년, TV 도쿄) - 비트 타케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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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법률문서 『官報』1918年07月11日 敍任及辭令
[238] 법률문서 『官報』1923年12月06日 敍任及辭令
[239] 법률문서 『官報』1928年10月05日 敍任及辭令
[240] 법률문서 『官報』1933年04月10日 敍任及辭令
[241] 법률문서 『官報』1936年12月29日 敍任及辭令
[242] 법률문서 『官報』第3711号「叙任及辞令」 1939-05-23
[243] 법률문서 『官報』1940年08月13日 敍任及辭令
[244] 법률문서 『官報』1942年09月21日 敍任及辭令
[245] 법률문서 『官報』1913年06月02日 敍任及辭令
[246] 간행물 『官報』1920年06月26日 敍任及辭令 NDLDC
[247] 간행물 『官報』1928年10月01日 敍任及辭令 NDLDC
[248] 간행물 『官報』第3395号「叙任及辞令」 1938-05-02
[249] 간행물 『官報』1939年04月24日 敍任及辭令 https://dl.ndl.go.jp[...]
[250] 간행물 『官報』1940年1月24日 敍任及辭令 NDLDC
[251] 간행물 『官報』第4106号「叙任及辞令」 1940-09-11
[252] 간행물 『官報』1941年7月1日 敍任及辭令 https://dl.ndl.go.jp[...]
[253] 간행물 『官報』1942年02月12日 敍任及辭令 NDLDC
[254] 간행물 『官報』1942年02月24日 敍任及辭令 NDLDC
[255] 간행물 『官報』1942年09月16日 敍任及辭令 NDLDC
[256] 간행물 『官報』第4915号・付録「辞令二」 1943-06-03
[257] 간행물 『官報』1943年06月05日 敍任及辭令 NDLDC
[258] 간행물 『官報』1943年07月30日 敍任及辭令 NDLDC
[259] 웹사이트 長谷川清外三十一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の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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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백과사전 도우죠히데키 [東條英機]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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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서적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 북마크 2011
[268] 서적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 북마크 2011
[269] 서적 일본 총리 열전 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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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서적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 북마크 2011
[272] 뉴스 요미우리 신문 '전쟁책임 최종보고서 2' 한국일보 2006-08-16
[273] 서적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 북마크 2011
[274] 서적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 북마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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